부미푸트라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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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말레이지아에서 신문을 읽다보면 주택분양시 부미푸트라에게는 10% 할인해 주겠다거나, 몇 채는 부미푸트라에게 할당해 놓았다는 등의 광고가 공식적으로 게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부미푸트라 기업에게만 기업자금을 주겠다는 기관도 있고, 부미푸트라만 거래할 수 있는 토지가 있으며, 고용정원의 일정 수를 부미푸트라에게 배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로 말레이지아 정부가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부미푸트라정책 때문입니다.
내부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의 눈에 부미푸트라 정책은 심한 인종차별로 보일지 모르지만, 상대적 약자인 말레이인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말레이지아 사회를 실질적인 평등과 안정에 한 발 다가서게 한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ㅇ 우선 부미푸트라라는 용어를 살펴보면 부미(Bumi- 땅 또는 대지)와 푸트라(Putra- 자손 또는 왕자)라는 단어의 복합어로, ‘이 땅의 자손’ 혹은 ‘이 땅의 주인’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말레이지아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고 있지만 총인구 2천만명 중 62.7% 정도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도 말레이인과, 인구의 28.8% 정도인 중국계 그 외의 인도계 등 68개의 다양한 종족이 종교나, 거주지, 직업, 즉 소득 등을 달리하면서 자신들의 전통적인 문화를 유지한 채 병존하는 이른바 ‘복합사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들중 이 땅에 아주 오래 전 이주해온 종족과 토착인, 이슬람교도들을 통틀어 부미푸트라 라고 하는데, 대체로 중국계 주민보다 빈곤한 편입니다. 이중에서 두드러진 종족은 중국계입니다. 전체인구의 28.8%밖에 안되지만 먼저 이주해온 다른 종족보다 훨씬 부유하며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식민통치 160여년동안 고무, 야자 등의 농장과 주석광산 개발을 위해 인도인과 함께 노동자로 이 땅에 끌려온 중국인들은 근면을 바탕으로 영국인이 물러간 자리를 차지하면서 부를 축적해 나갔습니다.
중국인들이 경제권을 대부분 장악하게 되자 상업의 중심거리에는 한자간판이 넘쳐나고, 중국식 주택, 학교 건립, 불교사찰 건설 등으로 이 나라가 중국인지 말레이지아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영국 식민통치에서 정치적으로 독립은 되었으나 10여 년만에 중국인과의 격심한 빈부차로 또 다른 경제적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ㅇ 1969년 5월 13일 드디어 말레이인들의 쌓여있던 불만이 폭발하였습니다.
이들은 중국인만 모여 사는 중국인 촌을 공격하고, 중국인만 다니는 중국영화관 앞에서 기관총을 난사했습니다. 중국상점이 있는 곳에 불을 지르고, 중국인을 죽여야 한다는 괴문서가 나돌고,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습니다.
이 폭동은 집권당은 물론 각계각층에게 반성의 계기가 되었고 중국인 내에서도 반성이 뒤따랐습니다. 아무리 돈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국인이라지 만 이제 먹고 살 만하니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인들은 말레이인들이 사는 마을로 이사 가기도 하고 그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던 태도도 자제하였습니다. 또한 집권당은 이러한 사태의 근본원인을 소득 불균형과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서 찾았습니다.

이는 1970년도 말레이지아 내국인의 자본소유현황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말레이계가 6.5%인 반면 중국계들은 90%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총리의 하야로 새로이 총리가 된 Tun Abdul Razak은 각계각층의 전문가로 정책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약 1년간에 걸친 논의 끝에 20년간(1971-1990)의 장기발전계획을 세웠습니다.

중국인보다 먼저 이주해왔지만 상대적으로 빈곤한 말레이인종, 토착인종, 이슬람교도들을 전부 통틀어서 부미푸트라로 정하고 이들을 구조적으로 부양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미푸트라정책 입니다.

ㅇ 이를 위해 근본적인 부의 재편성작업이 착수되었습니다. 이는 부미푸트라의 소득증대를 위해 취업을 보장해주고, 고등교육의 기회를 확대하며, 사업자금을 조달해주는 것입니다. 고용 기회의 확대를 위해 비(非) 부미푸트라 기업도 부미푸트라를 고용하도록 장려하는 정책을 펴고, 중국인 기업에 임원으로 취직시켜 경영방법을 습득하도록 했습니다.
주택을 분양 받을 때도 10% 할인해 주도록 장려하였습니다. 또한 대학정원중 상당량의 쿼터를 부미푸트라에게 할당하여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시행에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상대적 불이익을 당한 비부미푸트라들, 특히 교육열이 높은 중국인들에겐 대학의 문이 너무 좁았기 때문입니다. 8개뿐인 종합대학의 정원이 6만명(1990년 기준)밖에 안 되는 데다 부미푸트라에게 70%의 쿼터를 배정해 놓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대단히 우수한 학생이 아니고서는 국내대학에 들어갈 수 없어 해외유학을 떠나야 했습니다.
또한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단지 부미푸트라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급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ㅇ 그러나 이런 불만을 갖고 있는 중국인들도 부미푸트라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중국인들은 중산층으로서 나름대로 의사표시의 통로를 가지고 있었고, 민족의 이익을 기치로 내건 20여개 정당들이 난립하는 속에 중국인들의 정당은 연립내각내 제2의 계파로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10여년전 독립할 당시에야 비로소 정식 시민권을 부여받을 만큼 정착의 뿌리도 약했고, 중국의 공산화로 돌아갈 조국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ㅇ 어쨌든 인종간의 소득 불균형을 시정한다는 목적으로 극약처방 같은 차별정책을 실시한 지 25년 이상 지났고, 그 결과 전체 내국인 소유자본 중 30%를 부미푸트라계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상당한 조정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한 부미푸트라계는 소득과 생활의 향상이 이루어졌고, 중국상인으로서는 생명을 위협하던 이들이 구매력 있는 소비자로 등장하게 되어 서로에게 득이 된 셈이기도 합니다.

ㅇ 부미푸트라정책이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은 말레이지아인들의 국민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인이 말레이지아에 와서 가장 많이 듣는 영어는 ‘Reasonable(합리적)’하다는 말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의 의견이 다 일리가 있으므로 이를 절충하면 합리적인 의견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말레이지아 국민들은 또 대체로 유순하지만 자기의 불만을 쉽게 주장하는데, 이는 상대방과 일전을 겨루겠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사정이 이러하니 상대방이 알아주기 바란다는 ‘Appeal’의 개념입니다.
따라서 서로 의견을 나눠보고 합리적인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인종간 갈등이 항상 내제된 사회이기 때문에 불만이 쌓이지 않도록 Appeal 과 Compromise(타협)를 관습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ㅇ 이렇게 국민화합을 이룬 말레이지아는 LA 폭등과 보스니아 내전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고, 20여년 전에 발생한 비슷한 사태를 슬기롭게 헤쳐나간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어 얼마 전만 해도 한국의 경제발전을 배우러 왔던 말레이지아였지만 이제 그들에게서 경제발전의 성공을 배우러 저개발국 지도자들이 줄을 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인종갈등이 있는 나라의 지도자들은 말레이지아의 부미푸트라 정책을 배우러 온다는 사실입니다.

– 부미푸트라 –
부미푸트라(토지의 자손)는 다음의 3가지로 분류됩니다.①「오랑아슬리」로 불리는 원주 소수민족 – 주로 말레이 반도에 거주하는 원주민으로서, 숫자는 적으며 각지에 산재 ② 말레이계 민족 – 2개의 그룹으로 대별할 수 있으며, 1개그릅은 반도 동해안, 사라와크, 사바에 예전부터 정주하고 있던 그룹, 다른 1개 그룹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으로부터 말라카 해협을 건너서 이주해온 그룹 – 이외에도 19세기 후반부터 주로 말레이반도에 이주해온 자바족 등이나 사바의 바쟈우족등이 말레이계 민족으로 편의상 분류되고 있음. – 이러한 민족은 문화를 공유하고 이슬람교를 신앙으로 하고 있으므로 급속하게 말레이 사회에 동화③ 비 말레이계 부미푸트라 – 사라와크, 사바에 예전부터 살고있던 민족으로서, 사라와크에는 이반족, 사바에는 카다잔족이 있으며 숫자도 많음.